시조 김수로왕
시조 김수로왕
시조 김수로왕 가락국기
고려 문종30년 요나라 대강2년(1076)에 금관(지금 김해)지주사인 문인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대략 간추려 싣는다
변한시대의 부족국가 형태,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에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기간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무릇 1만호에 7만 5천인 이었다.
하늘이 대왕을 보내심
후한의 시조인 광무황제 건무18년 임인(서기 42년) 3월 상사일 그들이 사는 곳에서 북쪽이 되는 구지봉(龜旨)에서 수상한 소리가 있어 사람을 불렀다. 구간들과 마을 사람 2.3백인이 이곳에 모여있었다. 사람들의 음성이 나는 듯 했으나 그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음성만 내었다. “여기 누구가 있느냐?”고 하였다. 구간들은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네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또 대답하기를 “구지로 소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건립하여 임금이 되라고 하시기에 하강 했느니라.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마루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노래를 하되 신(神龜)이여 신이여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을 것 같으면 굽고 구어 먹으리라. 하고 춤을 추어라. 이렇게 함은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는 너희들의 즐거운 춤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구간들은 그 말씀대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처다보니 자주빛갈의 밧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는 것이었다. 그 밧줄 끝을 찾아보니, 분홍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싸여 있었다 금합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태양같이 둥글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을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안고 와서 탁자 위에 모셔두고 여러 사람은 모두 흩어져 갔다.
시조왕 탄생과 가락국 건립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을 여니 여섯 알은 모두 어린 동자로 화신(化身)했는데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이내 평상에서 좌정하였다. 여러 사람은 모두 절하고 경하하면서 극진이 공경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장성하여 10여일이 지났다. 신장이 구척임은 은(殷)나라 탕(湯)임금과 같으시고 얼굴이 용안(龍顔)임은 한(漢)나라 고조 유방(高祖 劉邦)과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唐)나라 요(堯)임금과 같았었고 눈동자가 중동(重瞳)임은 우(虞)나라 순(舜)임근과 같으셨다. 그 보름날에 즉위하시니 세상에 처음 나타나셨다고 해서 어휘(御諱)를 수로(首露)라 하시고 혹은 수능(首陵)이라고도 하셨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 일컬었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서 오가야(五伽倻)의 임금이 되었다. 육가야의 동쪽은 황상강(黃山江: 지금 洛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쪽은 지리산(地理山 : 지금 智異山), 동쪽은 가야산(伽倻山)으로써 국경을 삼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가궁(假宮)을 세우게 하여 거처 하셨는데, 특히 질박하고 검소함에 중점을 두었으니 집의 이엉은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쌓은 계단의 높이는 3척(三尺)이었다.
궁궐 건립 사업
시조왕 2년 계묘(서기 43년) 봄철 정월에 왕은 말씀 하시기를 “짐(朕)이 도읍(京都)을 정하려 한다” 하시고 이내 가궁(假宮)의 남쪽인 신답평(新沓坪: 지금(畓谷: 논실 마을)에 행차 하시어 사방 산세를 바라 보시고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시며 말씀 하셨다. “이 지형이 여뀌 잎처럼 협소하기는 하나 특이하게 수려하여 가히 16나한(羅漢)이라도 살만한 곳이다. 하물며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었으나, 칠성군이 주거할 도읍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마침내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이에 1천5백보 둘레의 외성(外城) 궁궐(宮闕), 전당과 그리고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와 식량창고를 지을 장소를 마련한 후에 일이 끝나자 가궁으로 돌아 오셨다. 널리 나라안의 장정과 공장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정월 20일에 성곽과 궁지의 일을 시작하니 3월 10일에 이르러 공사가 일단 끝났다.
궁궐과 옥사만은 농한기를 기다려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시작하여 갑신년(서기 44년) 2월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택해 새 궁궐로 옮겨서 국정을 다스리시고 모든 일에 부지런 하셨다.
시조왕 탈해의 도전을 물리침
완화국 함달왕의 부인이 문득 임신하여 달이참에 큰 알을 낳았던 일이 있었다. 그 알이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탈해는 바다를 쫓아서 가락국에 오니 신장은 3척이요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웃으며 대궐에 들어오더니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뺏으러 왔습니다.“고 하였다. 왕은 대답하시되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은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인즉,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거니와 또 내 나라 내 백성을 너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니라“ 하셨다.
탈해는 이르기를 “그렇다면 술법으로 승부를 겨루어 보시렵니까?” 하니, 왕은 “좋다”고 하셨다. 삽시간에 탈해가 변하여 매가 되니,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되고 탈해가 또 변하여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하여 새매가 되셨다. 그 동안이 잠깐 사이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니,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셨다.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하였다. “제가 술법을 겨루는 장소에 있어 매가 독수리에게 그리고 참새가 새매에게서 잡히기를 면한 것은 아마도 성인께서 죽이기를 싫어하신 어진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술법으로 대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렵겠습니다.” 하고 곧 하직 절을 드리고 나갔다. 인교 밖 나루가에 이르러 중조의 배들이 와서 대이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이곳에 머물면서 반란을 꾸밀까 연려하여, 급히 수군 오백척을 보내어 추격 하였다. 탈해가 신라의 경계로 도망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 왔다. 이 기사에 적힌 일은 신라의 기록과 더불어 많이 다르다.
시조왕께서 아유타국 공주를 맞이하심.
건무 24년 무신(서기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왕을 조알(朝謁)하는 자리에서 말씀을 아뢰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아직 구득하지 못했으니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드려 왕후를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짐이 이곳에 하강함은 하늘의 명령이다. 짐의 짝이 되어 왕후를 삼는 일도, 또한 하늘이 명령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하지 말지어다.”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령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대기하게 하고 또 신기간에게 명령하여 승점으로 나가게 하였다.
문득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것이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햇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육지로 내려 왔다. 승점에서 바라보던 신귀간이 대궐로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다. 왕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기빠하셨다. 즉시 구간들을 보내어 목련의 돛대를 바로잡고 계수나무의 노를 저어서 곧 대궐로 모시어 오려고 하였다.
그 배안에 계시던 왕후는 말씀하시되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평소에 모르는 터인바 어찌 경솔하게 따라 가겠느냐”고 하셨다.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에게 말씀을 전달 하였다. 왕께서도 그렇게 여기시고 백관을 인솔하여 거동하셨다.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 6천보쯤 되는 곳에 납시어 산 기슭에 장막으로 임시 궁전을 설치케 하여 기다리셨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매게하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휴식하는데 거기에서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으로 폐백삼아 산신령에게 바치었다. 그 외에 시종해 온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와 조광이요, 그들의 아내인 두 사람의 칭호는 모정과 모량이었다. 그리고 노비들까지 합하면 모두 20여명, 갖고 온 금수능라와 의상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왕후 행차가 점점 행재소에 가까우니 임금님은 출영하여 함께 유궁으로 드시었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은 뜰 아래 나아가 배알하고 즉시 물러 났다.(61_16페
임금님은 유사에게 분부하여 잉신부처를 인도하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잉신은 사람마다 각방에 머물며 그 이하 노비들은 한방에 5.6명씩 있게하고, 난초로써 만든 음료수와 해초로써 만든 술을 주는 동시에 무늬있는 자리와 채색있는 방석에 재우며, 의복과 보물 등은 군인을 차례로 모아서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침전에 계시었다. 조용히 왕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라고 하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때의 일입니다. 금년 5월 중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이러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 내외가 다 같이 황천상제를 뵈오니 상제께서 이르시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 보낸 바로서 임금 자리에 오르도록 했으니 이에 신령하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이되게 하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하여 떠나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을 옮기여 멀리 반도를 구하여 지금 머리를 단장하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왕은 대답하셨다.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 간택의 청이 있었으나 듣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으로선 다행하오” 하시고 드디어 혼인을 맺으셨다.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내셨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 보내었는데 뱃사공은 모두 15명이었다.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 주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 오는데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었다.
그들의 각종 물품도 모두 싣고서 천천히 대궐로 돌아오니 시각은 정오가 되려했다. 왕후는 이에 중궁에서 거처하게 하고 잉신부처와 노비들은 한적한 두 집을 주어 인원 수에 따라 적당히 나누어 있게 하였다. 나머지 종자들은 20여칸 되는 빈관 한 채를 주어서 인원 수에 따라 적당히 나누어 있게 하고 날마다 주는 물품도 풍족 하였다.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보물은 내장고에 넣어 두고 왕후의 사철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제도의 정돈
하루는 왕께서 신하들에게 말씀하셨다. “구간들은 모두 백관의 장들이나 그 이름과 명칭이 다 소인, 농부의 별호이며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답지 못하다. 만약 외국인이 전해 듣는다면 반듯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시고 드디어 아도를 고처서 아궁이라 하고 여도를 여해라 하고 피도를 피장이라 하고 오도를 오상이라 하고 유수 유천의 이름은 윗글자는 움직이지 않고, 아래 글자만 고처서 유공 유덕이라 하고 신천을 고처서 신도라 하고 오천을 오능이라 하고 신귀의 음은 바꾸지 않고 글자 뜻만을 고처서 신귀라 하였다.
그리고 신하의 직제를 취관직을 설치한 방법이다.
새 정치와 허왕후의 내조
이제야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험이 서고 그 정치는 준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 졌다. 하물며 왕께서 왕후와 함께 거처하심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지에게 음지가 있는 것과 다르리요! 그 내조의 공은 도산씨가 하나라 우왕을 도운 일과 그리고 당나라 요임금의 딸이 순임금을 도와서 순의 후손인 교씨를 일컬은 것과 같았다. 어느 해 황후께서는 곰의 꿈을 얻어 태자 거등공을 탄생하셨다.
허왕후 세상을 떠나심
영제 중평6년 기사(189년) 3월 1일에 시조왕후께서 붕어 하시니 보수는 157세 이셨다. 나라 사람들은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고 구지봉 동북쪽 언던에 장례를 모시었다. 드디어 백성들은 자식처럼 사랑하시던 왕후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하여 처음 오실 때 닻줄을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이름하여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쳤던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 하고 붉은기가 들어 왔던 바닷가를 기출변이라고 하였다.
잉신인 천부경 신보 종정감 조광등은 가락국에 온 30년 후에 각각 딸 둘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을 지나서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 후 7.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해서, 고국을 그리워하던 슬픔만 품은채, 모두 죽으니, 그들이 살던 빈관은 텅 비어서 사람이 없었다.
시조왕께서 세상을 떠나심
원군께서는 매양 외로운 벼개를 의지하여 슬퍼함이 많으셨다. 10년을 지낸 헌제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보수는 158세 이셨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했으며 슬퍼함이 왕후의 돌아가시던 때보다 훨씬 더하였다. 마침내 궁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건립하니 높이는 일장이요, 주위는 300보이었다. 그 곳에 장례를 모시고, 이름하여 수능왕묘라 하였다. 아드님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왕까지 왕묘의 향사를 모실 때에는 모름지기 해마다 정월의 3일, 7일과 5월 5일과 8월 5일,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을 서로 계승하여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문무왕이 수능왕묘를 종묘로 모심
신라 제三十대 법민왕(法敏王 : 문무왕)은 용삭元年 신유(六六一) 三월 어느 날에 조서를 내렸다。『짐(朕)은 가야국 시조왕의 九대손 구형왕(仇衡王)께서 우리나라에 항복하실 무렵, 거느리고 온 왕자인 세종(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舒玄) 갑간(原干:蘇判)의 따님 문명황후(文明皇后 : 文姬)는 진실로 나를 낳으신 분이다。
이러므로 시조왕(=수로왕)은 나에게 十五(=十三)대 시조가 되신다。그 나라는 이미 패망했으나 그 사당은 남았으니 종묘(宗廟)로 모시어 제사를 계속하게 하리라』。이내 사자(使者)를 가야(伽倻)의 옛 터에 파견하여 수능왕묘(首陵王廟) 근방의 상상전 삼십경(三十頃) : 九萬坪)을 바쳐 제사를 마련할 토지로 삼고、왕위전(王位田)이라 이름해서 본토(本土:伽倻郡)에 소속시켰다。
시조왕의 十七대손인 갱세(康世) 급간(及于 : 구등관)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그 왕위전을 주관하였다。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와 여러가지 제물 등을 진설하여 제사를 드렸는데 해마다 빠뜨리지를 않았으며 그 제사날도 거등왕의 정하신 연중 오일(年中五日)을 바꾸지 않았다。그리하여 향기롭고 효성스러운 제사는 이제야 우리(가락후손)에게 맡겨졌다。
거동왕께서 즉위하신 기묘년(一九九)에 편방(便旁 : 祭閣)을 설치한 이후부터 내려와 구형왕 말기(五三二)에 이르기까지 三百三十四년 동안에는 왕묘의 제사가 영구히 변경되지 않았으나 구형왕께서 왕위를 잃고 나라를 버리신 때(五二二)로부터 용삭원년 신유(六六一)에 이르기까지 六十<=一백三十三〉 년 사이에는 수능앙묘의 향례가 간혹 빠뜨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아름답다。문무왕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서 다시 봉행 함이여!
수능왕묘의 영험 1
신라의 말기에 충지 갑간(忠至匣干)이란 자가 있었다。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뺏아 성주 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그 부하에 영규 아간(英規阿干)이란 자가 있어 성주장군의 세력을 등대고 수능 왕묘의 제향을 가로 뺐아 음사(淫祀)하였다。 단오날의 고사(告祠)를 치르는 중에 사당의 문 주방이 까닭없이 부러져 영규는 치어 죽었다。이에 성주장군은 혼자 말했다。『다행히 전생의 인연으로 외람되게 성왕께서 다스리시던 바 국성(國城)에서 제전(祭典)을 올리게 되었다。나는 마땅히 그 화상을 그려서 향불과 등(燈)으로 받들어 깊은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드디어 교견(鮫絹) 三尺에 화상을 그려서 벽 위에 봉안하고 아침 저녁 촛불을 켜서 정성껏 우러러 받들었다。겨우 三일만에 화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려 땅 위에 고인 것이 거의 한 말쯤 되었다。성주장군은 크게 두려워서 그 화상을 모시고는 왕묘에 나아가 불살라 없앴다。
즉시 왕의 진손(眞孫)이 되는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어제도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가? 이는 왕묘의 위령(威靈)이 내가 화상을 그려서 공양하는 일이 불순한 소행이라고 크게 노하신 듯하다。영규(英規)가 이미 죽음에 나는 매우 놀라고 두려웠는데 화상을 이미 불에 태웠으니 나는 필연코 왕령(王靈)의 벌을 받을 것이다。경(卿)은 수로왕의 진손이니 그전대로 제향을 받드는 것이 합당할 줄 믿는다』
규림(圭林)이 대(代)를 이어 제향을 받들다가 나이 八十八세에 세상을 버리었다。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하여 제사를 잘 모시었다. 단오날의 알묘(謁廟)하는 제향에 영규(英規)의 아들인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 왕묘에 와서는 간원(間元)이 차려 둔 제전(祭典)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 향사하더니 삼헌(三獻)을 채 끝나기도 전에 급작스러운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에 『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앙화를 받는다』고 했는데 전에는 영규(英規)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俊必)의 일이 있었으니 그들 부자를 두고 말한 것인가?
수능왕묘의 영험 2
또 도둑의 무리가 있어 능묘(陵廟)의 가운데는 금과 옥이 많이 있을 것이라 하고는 몰래 와 훔쳐 가려고 하였다。처음 올적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활을 당기고, 화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능묘 가운데서 나와 四면으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七、八명이 맞아 죽음으로 도둑의 무리는 달아났다。
몇일 만에 다시 온즉, 큰 구렁이가 나타났는데 길이는 三十여척이요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능묘 곁에서 나와 八、九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흩어져 달아났다。그러므로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필연코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함을 알겠다。
건안(建安)四年 기묘(一九九)에 처음 능묘를 축조합으로부터 금상(今上 文宗)즉위 三十一年인 대강(大康)二년 병진(一0七六)에 이르기까지 무릇 八百七十八년이다。봉축의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으며 심은 바 아름다운 나무들도 마르거나 썩지를 않았고 더구나 배열(排列)해 둔 많은 옥돌 쪼각도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
이로서 본다면 당(唐)나라의 시어사(侍御使)이던 신체부(辛替否)의 말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패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했지마는 오직이 가락국이 예전에 이미 패망한 일이야 신체부의 말이 그렇다고 하겠지만 수로왕의 능묘가 허물어지지 않는데는 신체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시조왕 사모하는 놀이
이 가운데 다시 즐거운 놀이로 옛날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매년 七月 二十九일에 이 지방의 백성과 아전과 군졸들은 승점(乘占)에 올라가 장막을 쳐 놓고 술과 음식으로 환호성을 올리면서 이리 저리 바라본다。건장한 사람들은 좌우 두편을 갈라 망산도(望山島)에서 날랜 말굽으로 육지를 향해 달리며 제바른 뱃머리를 두둥실 바다에 밀어서 북쪽으로 고포(古浦)를 향해 앞을 다투며 달아난다。대개 이 놀이는 옛날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이 왕후의 오시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시조왕께 아뢰었던 옛 풍속이다.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비(구지봉)
후손 통정대부행의효전향관 김운배 근찬
외예 정헌대부행의정부찬정 규장각제학 여흥 민영린 근서 후손 통정대부행옥구군수 김종응 교정
가락 壬寅년에 대왕께서 천명을 받들고 三월 三일에 한강하시니 매우 신성하다。炳然 한 저 玉牒은 百靈도 肅敬했는데 天瑞를 내려주시니 日輪같은 符命이로다。北斗성의 남쪽이자 伽倻山의 동쪽에서 하늘 말이 煌煌성하니 거룩한 龜峰이로다。
발상한 지역이며 천명받은 곳이다。천년을 어제 같이 四海가 追慕하도다。天下를 照臨하시고 天上을 陟降하도다。漢封과 秦刻은 泰山 永宗이로다。여기 立石함에 神人이 모두 蕭敬하도다。主浦碑와 胎峰碣도 불일간 완공 하리로다。山河에 盟誓하고 臣이 碑銘을 새기도다。거룩하신 太王은 天降의 神聖이라 日月이 光華한데서 天命을 克配하셨도다。
대한二년 무신 (一九○八) 十一월 일 건립
가락국 시조대왕 탄강 신성비(구지봉)
삼가 동국여지승람을 살피건대 『후한의 광무 建武十八년 임인 서기四二년) 三월에 가락 九간인 아도간、여도간、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이 물가에서 목욕하고 술을 마시다가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음성이 있으므로 이에나아가 보았다。자주빛 밧줄이 금합(金盒)을 매어서 내려 오므로 열어보니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는데 태양처럼 둥굴었다。아도간의 집에 모셔 두었다。이튿날 九인이 모두 모여서 또 열어 보았다.
여섯 알을 껍질을 깨니 여섯 동자(童子)가 되었는데 나이는 十五세 가량이며 용모는 매우 거룩하므로 여러 사람은 모두 절하고 경하하였다。동자는 나날이 장성하여 十여일이 지남에 신장이 九척이나 되었다。여러 사람은 마침내 한 분을 받들어 임금님을 삼으니 곧 수로왕(首露王)이셨다。금합(金盒)에서 탄생하므로 인하여 성을 (金)씨라 하시고 국호를 가야(伽倻)라 하였다。 나머지 다섯분은 각각 돌아가서 다섯 가야(五伽倻) 임금님이 되셨다。동쪽은 황산강(黃山江: 洛東江)으로, 서남쪽은 바다로 서북쪽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으로써 국경을 삼았다。
수로왕께서는 재위 一百五十八년에 훙어하시고 다음 거등왕(居登王)、다음 마품왕麻品王)、다음 거즐미왕(居叱彌王)、다음 이시품왕(伊尸品王)、다음 좌지왕(坐知王)、다음취희왕(吹希王)、다음 질지왕(狂知王)、다음 염지왕(鉗知王)、다음 구해왕(仇亥王)까지 서로 계승하여 임금님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는 무릇 四백 九十一년 이었다。다섯 가야(五伽倻)는 고령(高靈)이 대가야(大伽倻)가 되고, 고성(固城)이 소야(小伽倻)가 되고 성주(星州)가 벽진가야(碧珍伽倻)가 되고, 함안(咸安)이 아나가야(阿那伽倻)가 되고, 함창(咸昌)이 고령가야(古寧伽倻)가 되었다。
김해부 서쪽 三백 보쯤에는 수로왕 능묘(首露王陵廟)가 있고 구지봉 동쪽에는 허황후능(許皇后陵)이 있다。세전(世傳)에 왕비께서는 아유타국 왕녀라 하고 혹은 남천축국 왕녀라 하는데 姓은 허(許)씨 이름은 황옥(黃玉 : 皇玉) 혹은 보주태후(普州太后)로써 왕능제향 때에 합사(合祀)한다」고 하였다。이는 가락국기와 더불어 대략 동일하므로 비석(貞珉)에 새겨서 삼가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미미한 정성을 표하는 바이다.
가락국기 1935년 병진(서기 1976) 9월 15일.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