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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군 목경 (경파)

김녕군 목경 경파

김해김씨 경파 중조 김목경(金牧卿)은 1331년 고려 충혜왕때 입조하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김녕군에 봉해졌다. 삼중대광은 정1품의 품계로서 월래 벽상삼한(壁上三韓), 혹은 삼중대광이라 칭하던 것을 1362년 공민왕11년에 둘을 합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라 하였으며 혹은 단순히 벽상공신이라고도 하였다.

충혜왕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고, 그 정난(靖難)의 공으로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때 왕이 혼미하여 국사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니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간언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벼슬을 내어놓고 속리산으로 은퇴하여 미록(靡鹿)과 벗하여 일생을 마쳤다.

한편 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가 있을때 판도판서로 시종 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서북면 순무사가 되어 이방실,안우로 하여금 홍건적을 대파 하게하고 도첨의 찬성사가 되어 왕이 소중히 여기고 중용하자, 저 간악한 김용(金鏞)이 공을 시기하였다. 마침 공이 내간상(內艱喪)을 당했음을 기회로 간계를 써서 내몰고 말았다. 김용이 홍왕사 변으로 체포되어 처형되고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우두머리가 되어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등 일반 백성들로부터 성인이란 칭호까지 들었다. 이때 김보는 도첨의 찬성사로 개혁정치에 참여했으나 신돈은 차츰 교만해져 전횡이 날로 심해졌다. 이에 공이 신돈을 탄핵하자 신돈으로부터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심해져 드디어 주살되자, 공은 다시 복귀되어 공민왕 14년, 6월 삼중대광문하시중 이란 최고 관직에까지 이르렀다.

공이 졸함에 조정에서는 국정을 바로세우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신돈의 잘못을 임금에게 극간한 공의 충성심을 기려 충간(忠諫)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천 도유동에 안장했다.

공의 5세손 진손(震孫)이 4남을 두었는데, 장남-영견(永堅), 차남-영서(永瑞), 3남-영정(永貞), 4남-영순(永純),이 각각 이조참판, 횡성현감, 자헌대지중추부사, 석성현감을 각각 역임하여 참판공,횡성공,안경공,석성공으로 분리 되었고 이를 합하여 김해김씨 최대 종파인 “경파” 라 칭한다.
김령군의 묘소는 경북 상주군 장암리 견훤산성에 있다.

     <  인터넷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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