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과 홍산문화
동이족과 홍산문화

동이족과 홍산문화
동북아에 세운 대한민족 최초 국가, ’배달‘
1) 홍익인간의 도로 다스린 배달
환국 시대 말, 인구 증가와 물자 부족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서자부(庶子部)부족의 환웅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기를 갈망하였다. 이에 환국의 마지막 임금 지위리(智僞利)환인께서 환웅을 동방 개척의 선봉장으로 세우셨다. 백두산을 향해 떠나는 거발환 환웅에게 종통과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을 내려 주고, 문명개척단 3천 명을 붙여 주셨다.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신시(神市 신의 도시)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나라 세움을 고하였다. 거발환(居發桓)환웅께서 동북아 한민족사의 최초 국가인 배달의 역사를 여신 것이다.
배달은 밝음을 뜻하는 ‘배(밝)’와 땅을 뜻하는 ‘달’을 합친 말로서 ‘광명의 동방 땅’을 뜻한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 하는 것은 한민족사의 첫 번째 나라인 배달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동방 백두산으로 떠날 무렵, 중국 창세 신화의 주인공인 반고(盤固)가 다른 한 무리를 이끌고 삼위산(三危山)으로 향하였다. 『삼성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반고는 환국 말기에 삼위산을 배경으로 중국 역사를 처음으로 개척한 실존 인물인 것이다.
환인천제로부터 국통 계승의 증표로 천부와 인을 받은 거발환환웅은 국가 통치이념도 전수 받았다. 그 이념이 바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대부분 고조선의 국시(國是)로 잘못 알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은 사실 9천 년 전 환국의 통치 이념인 것이다. 거발환환웅은 재세이화(在世理化)를 기반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였다. 다시 말해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신교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서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 것이다.
환웅천황은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 삼백(三伯)오사(五事)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신교의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환웅은 이어서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하여 신교의 우주관, 신관, 인성론, 수행관에 관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천부경』은 환국 때부터 구전되다가 배달 시대에 문자로 옮겨진 인류 최고(最古)의 경전이자 우주론과 인간론의 진수가 압축되어 있는 인류사 최초의 계시록이다. 『삼일신고』는 백성의 교화를 위해 환웅천황이 직접 지은, 다섯 장으로 구성된 신학서(神學書)이다.
2) 배달의 위대한 성인 제왕들
백두산의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특히 세 분 성황이 지대한 공덕을 남겼다. 그 세 분은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그리고 치우천황이다.
태호복희씨는 5,600년 전, 배달의 5세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하도(河圖)를 그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수의 체계를 세웠다. 종이 한 장에 다 그려지는 이 도표 하나에서 음양오행 원리가 나오고, 공간과 시간의 순환 원리가 나온 것이다. 복희씨는 또한 팔괘(八卦)를 그어 「주역」의 기초를 닦음으로써 인간이 천지 시공간의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해시계로 일컬어지는 규표(圭表)를 발명하고, 24절후(節候)를 발견하였다. 복희씨는 한마디로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이다.
약 5,200년 전, 8세 안부련환웅 때 인물인 염제신농씨는 산에 불을 질러 농토를 만들고, 나무로 쟁기와 보습 같은 농기구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수백 가지 풀을 직접 맛보아 의약을 개발하였고, 시장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농경의 시조’, ‘의학의 시조’, ‘교역문화의 창시자’ 등으로 불리는 신농씨에 이르러 배달의 문명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신농씨는 오늘날 호북성 수주(隨州)시 여산진(厲山鎭) 열산(列山)에서 창업하여 신농국을 세웠고, 그 나라는 8대 유망(楡罔)에 이르기까지 약 530년 동안 존속하였다.
배달은 14세 자오지환웅(치우천황)에 이르러 동북아의 드넓은 땅을 다스리는 강국이 된다. 치우천황은 먼저 신농국을 복종시켜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을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고, 이어서 동북아의 천자가 되고자 모반을 꾀한 서토 지역의 제후 헌원의 군대를 10년에 걸친 전쟁(탁록대전) 끝에 무너뜨렸다. 그리고 넓어진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청구(靑丘 현대릉하 유역)로 옮겨 배달의 전성기인 청구 시대를 열었다. 4,700년 전 서방으로 진출하여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치우천황은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법력과 위용을 떨친 한민족의 성웅(聖雄)으로, 한민족은 물론 중국 백성들까지 추앙하였다.
요컨대 태호복희, 염제신농, 치우천황, 이 세 분은 동방 문명의 중심축을 세운 위대한 성인 제왕이다. 세 성황이 다스린 배달 시대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학, 천문, 의술, 농경 분야가 크게 발전한 때이다.
3) 배달겨레, ‘동이족’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배달의 역사는 중국 역사서에 ‘동이(東夷)’의 역사로 기록되어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 역사가와 학자들은 동방 한민족을 동이라 칭한다.
동이는 무슨 뜻일까? ‘동(東)은 태양이 떠오르는 광명의 방향이다. 그래서 ‘동’은 생명의 탄생, 시작을 뜻하고, 광명사상의 발원지를 의미한다. ‘동’은 ‘주인’, ‘주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객인은 서쪽 계단으로(主人就東階,客就西階]”『예기』 「곡례(曲禮)」라는 기록에서, ‘동’은 주인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방동(房東)’이란 말을 ‘집 주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이(夷)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는 ‘동(東)과 마찬가지로 ‘동쪽’을 뜻하며 동시에 ‘뿌리(柢)’를 뜻한다. 『후한서에서 “동방을 이(夷)라고 하는데, 이(夷)란 것은 저(祗)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이’는 ‘동방의 뿌리’라는 숭고한 의미가 담긴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종합 자전인『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동방에 사는 사람’을 ‘이’라고 불렀는데, ‘이’ 자는 ‘대(大)’와 ‘궁(弓)’을 결합시킨 글자이다. 여기서 ‘대’ 자는 ‘사람’을 뜻하므로, 결국 ‘이’ 자의 모양은 ‘활을 메고 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는 ‘어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의 옛 글자는 ‘이(이)’인데, ‘이’는 ‘어질다(仁)’는 의미로 쓰였다. 이상의 뜻으로 볼 때, ‘이’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오랑캐 이(夷)자가 결코 아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동이’는 ‘동’과 ‘이’가 합쳐진 말로서 ‘동방의 뿌리 되는 민족’, ‘동방의 큰 활을 잘 쏘는 민족’, ‘동방의 어진 민족’을 뜻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도 동이가 사는 땅을 ‘어진 군자가 사는 나라’『논어』「자한子罕」라고 하며 그곳을 동경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인들이 동방 민족을 ‘동이’라 부른 것은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후부터이다. ‘큰 활[大弓]의 위엄을 두려워한 한족이 배달민족을 가리켜 ‘큰 활을 잘 쏘는 동방 사람’이라 부른 것이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동이’는 ‘배달 동이’로 불러야 옳다.
4)중국 역사를 주도한 동이족
‘배달 동이’는 치우천황의 영토 개척을 계기로 서토(西土) 깊숙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 후 고조선 시대에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이끈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동북아 창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이이다. 대만과 중국 학자들도 중국 역사의 주류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이라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았다.
‘한족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헌원을 비롯하여 오제(五帝)로 꼽히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과 그 뒤를 이은 하상주 3왕조의 개국조인 하나라 우(禹), 상나라 탕(湯),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까지 모두 동이족 혈통이다. 특히 상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제도와 풍습이 당시 그들의 상국(上國)이던 고조선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주나라 초기에 염제신농의 후손인 강태공이 봉해진 곳인 제나라도 동이족의 나라이다. 무왕이 산동성의 주세력인 동이족을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태공을 왕으로 앉히고 제나라를 만든 것이다. 제에 이웃한 노나라 역시 동이족 국가이다. 주 무왕의 아우인 주공(周公)이 노나라 초대 왕으로 봉해졌으나, 주공은 자신의 아들을 대신 앉혔다.
주나라가 망한 후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기에도 동이족 국가가 여럿 출현하였다. 춘추 시대를 주도한 다섯 나라에 속했고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 전국칠웅의 하나이자 노자가 태어난 초나라 등은 모두 동이족이 세웠다. 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왕(秦王)정(政)(진시황)의 선조도 동이족 출신이다. 한마디로 중국 고대사는 바로 배달·조선 민족이 중국 현지에서 나라를 창업한 역사라 할 수 있다.
동이족은 중국의 역대 왕조를 일구었을 뿐만 아니라 배달 시대 이래 신교 삼신문화와 여러 가지 문물을 중국에 전수하였다. 동이 문화의 중요한 상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태호복희가 만든 팔괘이다. 복희씨는 간단한 부호로 음陰(–)과 양 陽-)을 표현하여 팔괘를 그리고, 이 팔괘로써 우주 변화의 이치를 밝혔다. 복희의 사상은 동이족의 이동과 더불어 중국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복희와 관련된 유적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중국 학자 리바이펑(李白鳳)은 “동이는 원래 황하 하류에서 살았고 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으며, 도자기와 문자를 처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에는 ‘철(鐵)자를 ‘철(金夷 )’이라 썼는데 동이가 가장 먼저 철을 사용하였기에 ‘이(夷)’ 자를 넣었고, 은나라 복사(卜辭)의 서법(書法)도 동이의 서법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도자기, 문자, 서법 같은 문화도 동이족이 중국에 전수한 것이다. 이 외에도 역법(曆法), 갑골문자, 천자(天子) 제도, 조세 제도, 윤리 규범 등 다양한 문물제도가 동이에서 출원하여 중국에 그대로 전수되었고, 그것이 황하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 문화는 결국 동이족이 창달한 것이다.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중국에 순수 한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족이라는 독립된 민족이 유전자(DNA) 검사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의 DNA 구조를 연구한 난주(蘭州)대학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한족은 과거 한때의 지역적 구분에 따른 것일 뿐이고, 특정한 정의를 지닌 민족으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현재 중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의 하카족(客家族)을 순수 한족이라 정의하였다. 이렇듯 고대 중국 역사를 일으키고 문화를 발전시킨 동이족은 또한 중국 민족을 구성하는 중심 세력이었던 것이다.
5)동이는 고대 동북아 문명의 주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동이’를 ‘동쪽의 오랑캐’라는 말로 알고 있다. 왜’동이’가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었을까? 화하족(중국 한족의 조상)과 동이족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 그 배경이다.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빗대어 일컬어지는 약 4,700년 전의 탁록대전으로 두 부족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탁록대전은 당시 동북아의 종주국이었던 배달의 치우천황에 대항하여 서방 화하족의 헌원이 일으킨 싸움이다. 10년간 73회의 공방전 끝에 패한 화하족은 그 후 2,300여 년 동안 황하 중상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진시황 때에 이르러 힘을 길러 중원 전체를 그들의 터전으로 만들면서, 화하족은 동이족을 중국 변방으로 밀어내거나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때 일부 동이족은 화하족으로 동화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동이와 대립되는 화하(華夏)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화하’라는 단어는 우임금이 세운 하(夏)나라에서 유래한 ‘하’에 ‘화’자를 더한 말이다. 중국 최초의 왕조 이름에서 따온 ‘하’를 중국 민족의 대명사로 쓰기 시작한 것은 주나라 때이다. 주나라는 동이족과 자민족 사이에 차별을 두기 위해 ‘하’란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자민족을 ‘제하(諸夏)라 칭하였는데, 동이족을 제외한 ‘중국의 전 민족’을 뜻하였다. 이때부터 하는 정치적으로는 중원 왕조를, 민족적으로는 중국 사람을, 문화적으로는 중원 문화를 가리키게 되었다. ‘하’자 앞에 ‘화’를 덧붙인 ‘화하’라는 말은 춘추 시대 이래 유행하였다.
『사서석지四書釋地』의 기록을 보더라도, 하·상·주 이후에 화(華)와 이(夷)를 구별하였지 그전에는 화와 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화하족과 동이족을 구분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를 내세운 것은 주나라 이후의 일이고, 본래는 중국에 화와 이의 구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하족이 중국 역사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동이는 오랑캐라는 말의 동의어가 되었다. 특히 전 중국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살던 동이족을, 화하족은 서로 다른 사방의 오랑캐족으로 나누어 불렀다. 그것이 바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다. 동일한 하나의 이족을 ‘사방(四方)의 이(夷) 즉 사이(四夷)로 분리시킴으로써 그전까지 중국 역사를 주도해 온 이족(夷族) 세력을 약화시켜 화하족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한 것이다.
동이족은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중국 각지에서 각 부족별로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등으로 세분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 열거된 이 아홉 종족을 통칭한 ‘구이(九夷)’는 ‘동이’의 다른 말인 것이다. 하지만 동이는 이 9족 외에도 인이(人夷), 조이(鳥夷), 엄이(奄夷), 남이(籃夷) 회이(淮夷), 욱이(郁夷), 서이(徐夷) 등으로 분화되었다.
구이는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그 활동 무대가 중국 문명 발전의 주요 지역을 두루 포괄하며 회수와 황하 유역, 산동반도, 발해만 일대 등에 이른다. 대만 역사학자 쉬량즈(徐亮之)도 ‘은나라에서 주나라가 망할 때까지 동이족의 활동 영역이 지금의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지역 등으로 광대하다'(『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고 밝혔다. 이처럼 ‘배달 동이’는 동방의 장자국(長子國)인 배달·조선과 함께 고대 동북아의 문화를 창조하고 꽃피운 주체세력이었던 것이다.

상나라 시대의 동이 국가 분포도 |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상나라 때 조이, 남이, 우이, 내이, 엄이, 서이, 회이, 방이, 황이, 도이, 견이 등 다양한 동이족이 중국 전역에 분포되어 살았다. 상나라도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6)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총塚·묘廟.단壇을 모두 갖춘 제천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배달 동이의 문화가 세상에 드러난, 요서 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끈 것은 홍산문화이다. 철광석으로 뒤덮여 산 전체가 붉게 보이는 ‘홍산(紅山)’에서 이름을 따 명명된 홍산문화는 요령성 조양시 건평(建平)현과 능원(凌源)현의 접경지역에서 번창했던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700~BCE 2900년경의 문명’이다.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東山嘴村)에서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굴되고, 1983년 그 인근 우하량촌(牛河梁村)에서 고대 인류의 정신문화를 가능케 한 3요소인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이 적석총 형태의 돌무덤[塚]이다. 적석총은 고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로 황하지역의 화하족 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약 5,500년에서 5,0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이 돌무덤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역사 기록이 바로 『환단고기』이며, 이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배달 동이’이다.
우하량의 여러 적석총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제2 지점의 것으로, 방형으로 짜여진 대형 무덤군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원형 3단 구조의 제단[壇]을 함께 갖추고 있다.
그 전체 구조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한다. 천원지방 구조는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의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5,500년 전에 배달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인 것이다.
홍산인의 신전[廟]은 우하량 제1지점에서 발굴되었으며 신전의 주인공은 여신이었다. 여신묘가 상당히 좁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전 터에서 세 여신상과 함께, 홍산인의 토템 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홍산인은 곰과 새를 신성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총·묘·단을 모두 갖추고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군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한족의 문화와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며 중국 황하문명 태동의 밑거름이 된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인 것이다.
7)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 문화 때문이다. 여러 적석총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우하량 제2지점 21호 묘의 남성 인골은 옥으로 옷을 해 입은 듯 무려 20점의 옥 장식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치장하고 있다. 부장품으로 옥기를 사용한 것은, 옥이 변하지 않는 보석으로 영생불멸을 뜻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홍산인들은 옥을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 신과 소통하는 신물, 천제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흔히 고대를 석기-청동기-철기의 3단계로 구분한다. 하지만 발해연안 영역에서 옥기로 뒤덮인 수천 년 전의 유적지가 대량 발굴됨에 따라 중국학자들은 청동기 이전에 옥기 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산문화 유물인 옥기 중에 배달과 고조선이 실제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이있다. 우하량 제16 지점에서 발굴된 ‘옥검(玉劍)과 내몽골 지역의 나만기(奈曼旗) 유적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도장인 ‘옥인장(玉印章)’ 등이 그것이다. 옥검은 놀랍게도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과 똑같은 양식을 띠고 있다. 한민족의 독특한 양식인 비파 모양의 칼이 고조선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배달 시대에 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옥인장은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로 BCE 4700년에서 BCE 2900년 사이에 번성한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옥인장을 가장 오래된 도장이라 하여 ‘중화민족제일인(中華民族第一印)’으로 규정하지만, 이는 중화주의에서 나온 근거 없는 주장일 따름이다. 옥의 재질이나 그 양식으로 볼 때 옥인장은 배달의 유물이다. 이 발굴은 『삼국유사』와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환국의 마지막 환인천제가 동방 역사 개창을 떠나는 환웅에게 종통의 상징으로 천부인(天符印)을 전수하였다‘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한다. 옥인장이 홍산문화 말기의 유물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5,000년 전부터 배달 동이족은 도장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홍산문화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문화(BCE 6200~BCE 5200)에서도 고대 동북아의 옥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흥륭와 지역에서 출토된 옥결(옥 귀고리)과 모양이 유사하고 만들어진 시기도 비슷한 옥결이 우리나라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옥결의 출토는 배달이 건국되기 이전인 BCE 6천 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最古)인 홍산문화를 중국은 황하문명의 원류로 규정하지만,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된 점이 중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난처함을 다민족 역사관과 동북공정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것이라 주장하면서, 동북공정을 실시하여 배달 동이족이 주도한 동북아의 고대사를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중국은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며 중국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제 경제대국을 넘어 문화대국으로서 장차 세계의 중심국이 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환단 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화에 대해 침묵하거나, 아예 우리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거짓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 세계 최고(最古) 문명의 주인공인 한민족의 잃어버린 시원 역사와 문화를 되찾아야 할 때이다.
<환단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