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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백두산 신시에 개국) 상편

배달국(백두산 신시에 개국) 상편

신시에 배달 개국 상편

太白逸史 第三 神市本紀 신 시 본 기

■ 「신시본기」는 환웅이 다스린 배달의 역사이다. 배달은, 환웅이 환국으로부터 종통의 상징인 천부[天符], 인[印]을 받고 동방을 개척하여 백두산에 도읍하였다.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하듯, 배달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하는 대명사이다.

■ 초대 거발환환웅의 동방 문명 개척과 14세 치우천황의 서토 정벌의 역사가 신화의 윤색을 벗고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환국본기[桓國本紀]가 인류 창세역사와 조화문명의 황금시절에 대한 기록이라면 「신시본기」는 인간의 정신과 문명을 열어 나간 교화문명 시대에 대한 기록이다

환웅천황의 동방 문명 개창

배달 개창기의 취화법

『진역유기震域留記』* 신시기[神市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웅천황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것을 보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음식과 양육[餽養]의 일을 전담하게 하셨다. 이분이 주곡[主穀] 벼슬을 맡았으나, 당시 씨 뿌리고 거두는 법이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또 불씨[火種]가 없어 걱정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높고 큰 나무가 말라 황량하게 줄기를 드러내고 오래된 나무줄기와 말라버린 가지가 서로 얽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서서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거센 바람이 숲 속에 불어닥치니, 땅 위의 온갖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고 오래된 나무줄기가 서로 마찰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불꽃은 번쩍번쩍 빛나며 잠깐 일더니 곧 꺼졌다. 이에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이것이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는 방법이로다” 하고,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나뭇가지를 마찰하여 불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을 일으키는 방법이 불편하였다.

다음날 다시 높고 큰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러 이리저리 배회하며 깊이 생각하는데, 홀연 줄무늬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고시씨[高矢氏]가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돌을 집어 힘껏 던졌으나 빗나가 바위 귀퉁이에 맞고 불이 번쩍 일어났다. 이에 몹시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금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었다. 이로부터 백성이 음식을 불에 익혀 먹게 되었다. 쇠를 녹이고 단련하는 기술이 비로소 일어나기 시작하여 물건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태고 문자의 창시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書契]를 만들게 하셨다. 신지씨[神誌氏]는 대대로 주명[主命] 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평평하게 모래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와 같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다만 그 후로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태고 문자가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구조가 쓰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찍이 남해도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등과 그 외 지역의 암석에 문자가 조각된 것이 간혹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문자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전서[篆書]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성하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럽다.

배달족의 문명화 과정과 동이 명칭의 유래

여환웅천황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비록 새, 짐승, 벌레, 물고기의 해는 없애게 하셨으나, 그래도 사람들은 아직 동굴과 움집 속에서 거처하였다. 땅의 습기와 바깥바람의 기운이 사람에게 침범하여 질병을 일으키고, 또 금수와 벌레와 물고기 무리가 한번 쫓겨난 뒤로 점차 인간을 피해 숨어버려 잡아먹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사[雨師]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이 살 집을 짓고, 소와 말, 개, 돼지, 독수리, 호랑이 같은 짐승을 잡아 길러서 이용하게 하셨다.
운사[雲師] 陸若飛[육약비]를 시켜 ‘남녀가 혼인하는 법’을 정하게 하시고, 치우로 하여금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잡는 직책’을 관장하게 하셨다.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14세 환웅)천황이 등극하여 구치[九治](채광 기계)를 만들어서 구리와 철을 캐시고, 철을 단련하여 칼과 창과 큰 쇠뇌[大弩]를 만들게 하셨다. 사냥을 가거나 전쟁을 할 때 이것에 신처럼 의지하니, 주위 모든 부족이 대궁[大弓]의 위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진 지 오래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 민족을 ‘이[夷]’라 불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른바 “이[夷]는 큰대[大]’자와 ‘활궁[弓]’ 자를 합한 자(大+弓)로 ‘동방 사람[東方人]’을 뜻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을 때 이라는 명칭을 융적과 함께 오랑캐의 칭호로 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주족인 웅족의 정착과 환족으로의 귀화

『삼성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强族]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푸시고[이삼신설교以三神設敎], 백성을 모아 맹세하게 하시니, 이때부터 은밀히 그 강족을 제거하려는 뜻을 두셨다. 당시 부족 호칭이 통일되지 않고 풍속은 점점 갈라졌다.

원주민은 호족[虎族]이고, 새로 이주해 온 백성은 웅족[熊族]이었다. 호족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직 약탈을 일삼았고, 웅족은 성품이 고집스럽고 우둔하여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두 부족이 비록 한 고을에 살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원해져서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 주지 않았고 혼인도 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서로 승복하지 않아, 한 길을 같이 간 적이 없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웅족 여왕[熊女君]이, 환웅천황께서 신령한 덕이 있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 천황을 뵙고 “원컨대 살 터전을 내려 주시어 저희도 한결같이 삼신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이를 허락하시고 살 곳을 정해주시어 자식을 낳고 살게 하셨다. 그러나 호족은 끝내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四海] 밖으로 추방하시니, 환족의 흥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초대 거발환(배달) 환웅의 동방 문명 개척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람은 많고 물자는 적어 살아갈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였더니, 서자부[庶子之部]의 대인 환웅이 민정을 두루 살펴 듣고 천계에서 내려와 지상에 광명 세상을 열고자 하셨다. 이때 안파견 환인께서 금악산[金岳山]과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을 두루 살펴보시고, “태백산은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이로다”라고 하셨다. 이에 환웅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간과 만물이 제자리를 잡았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를 거느리고 몸소 하계에 내려가 새 시대를 열어[開天]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 부권[父權]을 세우라.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평화롭게 하나 되게 하여 사도[師道]를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 [재세이화在世理化] 자손만대의 흥범으로 삼을지어다.” 하셨다.

그리고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시고 세상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셨다. 환웅께서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한다.
또한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왕명·형벌·질병·선악을 주장하게 하시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신교[神敎]의 진리로써 정치와 교화를 베풀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이때 응족과 호족[一熊一虎]이 이웃하여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와서 기도하며 환웅께 “하늘의 계율을 지키는 신시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환웅께서 신령한 주문[神呪]으로 체질을 개선시켜 신명을 통하게 하셨다. 또 삼신이 내려 주신 물건으로 신령한 삶을 얻게 하시니, 바로 쑥 한 단과 마늘 스무 개였다.

그리고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을지어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여야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르게 구제하며, 진정한 사람다운 인격을 갖춘 대인이 되리라” 하셨다.

웅족과 호족양가는 이것을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삼가며 스스로 수련에 힘썼다. 웅족은 굶주림과 추위와 고통을 참으며 하늘의 계율을 준수하고, 환웅과 한 언약을 지켜서 건강한 ‘여자의 인품의 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거짓과 태만으로 하늘의 계율을 어겨 끝내 천업[天業]을 함께 이루지 못하였다. 이것은 두부족의 천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웅씨족 여성들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음이 지나쳐서 이들과 혼인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매양 신단수 아래에 함께 모여 주문을 읽으며 아기를 가져 환웅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임시로 이들을 환족 백성으로 귀화시켜 살 곳을 주시고[得管境] 환족 남자와 혼인하게 하여 자녀를 낳게 하시니, 이로부터 모든 남녀가 점차 인륜의 도를 얻게 되었다.

그 후 단군왕검이라 불리는 분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이때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시니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할 영토였다.

신교의 제사 문화와 책력의 기원 : 칠회제신력

신시 시대에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이 있었다. 첫째 날에 천신(삼신 상제님)께, 둘째 날에 월신[月神], 셋째 날에 수신[水神], 넷째 날에 화신[火神]께, 다섯째 날에 목신[木神], 여섯째 날에 금신[金神]께 일곱째 날에 토신[土神]께 제사지냈다. 책력을 짓는 방법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계해를 쓰다가, (5세) 구을단군께서 처음으로 갑자를 쓰시고 10월을 상달[上月]로 삼으시니 이것이 한 해의 처음이 되었다. 6계[六癸]는 신시(배달) 환웅[神市氏]께서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지은 것으로 그때부터 계[癸]로써 첫머리를 삼았다. 계[癸]는 계[啓]의 뜻이며, 해[亥]는 핵[核](씨, 종자)의 뜻이니 ‘해가 뜨는 뿌리[日出之根]’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계[癸]는 소라[蘇羅]요, 갑[甲]은 청차이[淸且伊], 을[乙]은 적강[赤剛], 병[丙]은 중림[仲林] 정[丁]은 해익[海弋] 무[戊]는 중황[中黃] 기[己]는 열호수[烈好遂], 경[庚]은 임수[林樹], 신[辛]은 강진[强振], 임[壬]은 유불지[流不地]이다.

또 해[亥]는 지우리[支于離]요, 자[子]는 효양[曉陽], 축[丑]은 가다[加多], 인[寅]은 만량[萬良], 묘[卯]는 신특백[新特白], 진[辰]은 밀다[密多], 사[巳]는 비돈[飛頓], 오[午]는 융비[隆飛], 미[未]는 순방[順方], 신[申]은 명조[鳴條], 유[酉]는 운두[雲頭], 술[戌]은 개복[皆福]이다.

인류 전쟁의 시초

신시 환웅께서 처음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산에는 길이 없고 못에는 배와 다리가 없었으며, 금수는 무리를 이루고 초목이 무성하였다. 사람이 금수와 더불어 함께 살았고, 만물과 어우러져 같이 살았다. 짐승 떼에 굴레를 씌워 놀고 까마귀와 까치의 둥지에 기어 올라가서 살펴보았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때로 짐승의 피와 고기를 이용하였다. 옷을 짓고 농사지어 먹으며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사니, 이때를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는 세상[至德之世]’이라 일렀다.

백성이 살면서도 할 일을 모르고, 다니면서도 갈 곳을 모르며, 행동은 느리고 만족하며, 보는 것은 소박하고 무심하였다. 오직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 지면 쉬니, 하늘의 은택이 넘쳐흘러 궁핍을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만물과 백성이 더욱 번성하자 소박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로이 일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게 되어 비로소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짓는 자는 이랑을 두고 다투고 고기잡는 자는 구역을 두고 다투어, 싸워서 얻지 않으면 궁핍을 면할 수 없었다.

그 후에 활과 쇠뇌가 만들어지자 새와 짐승이 숨고, 그물이 펼쳐지자 물고기가 숨어 버렸다. 심지어 창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며 피를 뿌리고, 간과 뇌가 땅에 쏟아지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 (선천의 상극질서로) 본래 그러했기 때문[天意固然]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인류의 근원을 상고해 보면 모두 한 뿌리의 조상[一源之祖]이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동서로 나뉘면서 각기 한 곳에 웅거하고 지역의 경계가 아주 단절되어 사람이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수렵하고 나무를 채벌하는 외에 다른 험난한 일이 없었다.

수천 년이 지나고, 세상 판도가 이미 변하자 중국[仲國]은 당시 서쪽 땅[西土]의 보고[寶庫]였다. 기름진 땅이 천 리요, 기후가 좋아 우리 환족이 그 땅에 이주할 때 앞을 다투어 나아갔고, 토착민도 몰려들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자기 편이면 돕고, 뜻을 달리하면 원수처럼 여겨 싸움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만고 전쟁의 시초이다.

5세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

환웅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환웅이 계셨다.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반드시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잘 기르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장생의 법방이다.

태우의 환웅의 아들은 열둘이었는데 맏이는 다의발[多儀發]환웅이시요, 막내는 태호[太皞]이시니 복희[伏羲]라고도 불렸다. 태호복희씨가 어느 날 삼신께서 성령을 내려주시는 꿈을 꾸고 천지만물의 근본 이치를 환히 꿰뚫어 보시게 되었다.

이에 삼신산[三神山]에 가시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으셨다. 그 획은 세 개는 끊어지고[三絶] 세 개는 이어지는[三連] 음양 원리로 이루어졌다. 그 위치를 바꾸어 추리함은 오묘하게 삼극[三極]과 부합하여 변화가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雨師] 직책을 대물림하셨다. 후에 청구, 낙랑을 지나 진[陳] 땅에 이주하여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쪽 땅[西土]에서 나라를 세우셨다. 그 후예가 풍산에 나뉘어 살면서 역시 풍[風]으로 성을 삼았다. 후에 패[佩]·관[觀]·임[任].기[己]·포[庖]·리[理]·사[姒]·팽[彭] 여덟 씨족으로 나뉘어졌다.

지금의 산서[山西]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주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임[任].숙[宿]·수구[須句].수유[須臾]등의 나라가 모두 에워싸고 있다.

대변경[大辨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 관직을 맡으셨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관찰하여 괘도[卦圖]를 만들고, 신시 시대의 계해를 고쳐 갑자로 첫머리를 삼으셨다. 여와[女媧](복희의 여동생)”는 복희의 제도를 계승하고, 주양[朱襄]은 옛 문자를 기본으로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를 세상에 전하였다. 복희씨의 능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 남쪽에 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창업을 하셨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시고, 소전은 소호[少皞]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矢氏]의 방계 자손이시다.

당시 백성이 정착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하여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다. 곡식과 삼을 많이 생산하고, 각종 의약과 치료법 [藥石]도 점점 갖추어지자, 한낮에 저자(시장)를 열어 교역을 하고 돌아갔다.

14세 치우천황의 서쪽 영토 대정벌

유망[楡罔]에 이르러 정치의 속박이 가혹해지자 여러 음락이 사이가 나빠져 백성이 많이 흩어지고, 세상살이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 치우천황께서 배달 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치실 때, 하늘의 뜻을 밝혀 생명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開天知生], 땅을 개간하여 뭇 생명을 다스리게 하시고[開土理生], 사람의 마음을 열어 생명을 존중하게 하시니[開人崇生], 백성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그분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역량이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시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 북쪽[河朔]에 웅거하여 안으로 군사를 용맹하게 훈련시키고 밖으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셨다.

유망의 정치력이 쇠약해지자 치우천황께서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셨다. 형제와 부계 일족[宗黨]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인물 81명을 뽑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하시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 칼과 갑옷과 창과 큰 활과 호시[楷矢](싸리나무로 만든 화살)를 많이 제작하셨다.
그리고 전군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여 탁록[涿鹿]을 함락시키고, 구혼[九渾]에 올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셨다. 그 형세가 자못 질풍과 같아 만군을 복종시키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셨다.

1년 사이에 아홉 제후의 땅을 함락시키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구치[九治]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예과[芮戈]와 옹호극[戟]을 만드셨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거느리고 양수[洋水]로 출진하여 빠르게 공상[空桑]까지 진격하셨다. 당시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 유망의 도읍지였다.

이 해에 치우천황이 12제후의 나라를 모두 병합하실 때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니, 서토[西土](지금의 중국땅)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楡罔]이 소호[少昊]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울 때,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혼미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하니 소호가 대패하여 황급히 공상[空桑]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다.

치우천황이 즉시 하늘에 제사 지내어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여 고하시고, 다시 진군하여 탁록을 포위 압박하여 일거에 멸망시키셨다.
관자[管子]에 “천하의 임금 곧 치우천황이 급작스럽게 싸우며 한 번 노하심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헌원을 토벌하여 신하로 삼다 : 중화문명의 발상지 탁록

이때 공손[公孫] 헌원[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천황께서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병마를 크게 일으켜 치우천황과 승부를 겨루려 하였다.

천황께서 항복한 장수 소호[少昊]를 먼저 보내 탁록을 포위하여 멸하려 하실 때, 헌원이 오히려 항복하지 않고 감히 수 많은 전쟁에 나섰다.

천황께서 9군[九軍]에 명하여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시고,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탁록의 유웅[有熊]들판에서 여러 번 헌원과 맞붙어 싸울 때,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협공하여 참살하시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시니, 적군은 두렵고 손이 떨려 바쁘게 도망쳐 백 리 안에 병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수[淮水]· 태산[泰山] 땅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시고 회대[淮岱](회수와 태산)에 집을 지으시니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체로 당시 서쪽 땅의 사람들은 한갓 화살과 돌팔매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하였다. 또한 치우천황의 뛰어나고 강력한 법력에 부딪혀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헌원기[軒轅記]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이라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적의 낭패가 얼마나 심하였겠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치우천황이 더욱 군용을 정비하여 사방으로 진격하셨다. 10년 동안 헌원과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는 물러날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번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군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우리 배달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또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싸움마다 출전하였다.

이에 천황께서 불같이 진노하여 형제 종족으로 하여금 대격전에 힘써 싸우게 하여 위엄을 확고히 세우셨다. 그리하여 헌원의 군사로 하여금 감히 추격하거나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시고, 더불어 대전을 치뤄 한바탕 몰아쳐서 휩쓸어 버리신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치셨다.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蚩尤飛]라는 자가 급히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히도 전쟁터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이른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금살치우[擒殺蚩尤]”라고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천황께서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시니, 적진이 마침내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예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 예[芮]와 탁[涿]을 지키게 하시고, 동쪽으로 회대[淮岱](회수와 태산)를 취하여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쪽으로 침투할 길을 막으셨다. 천황께서 붕어하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진실로 길이 남을 찬란한 그 위엄이 후세인의 가슴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 하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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