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무대왕 김유신 장군 2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 2
김유신 장군 자세한 양력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도 격퇴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진평왕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를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대 화랑이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
김유신은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은 법흥왕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김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어머니 만명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열전에는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을 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현 충청북도 진천군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었다.
유신은 진평왕 건복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한다. 서현은 경진일 밤에 형혹성과 진성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 ‘진‘과 발음이 비슷한 ‘신‘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의 태몽과 탄생 설화에서는 ‘탄생하면서부터 용모가 비범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등에는 사마귀가 칠성처럼 박혀 있어서 기이했고, 임신 기간이 20개월이라는 모든 점으로 보아 보통 사람과는 다르기에 훌륭한 인물인 영웅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청년기 낭비성 전투
건복 46년,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유신이 군중에서 갖고 있던 직책은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이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
김춘추와의 만남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 김용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명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전쟁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계백이 이끈 백제군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다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염종 등이 일으킨 반란(비담의 난)에서 명활성에 들어간 반란군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고 말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 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남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남산에 있는 김유신의 동상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이 해 1월에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 북쪽 33개의 성을 빼앗았다. 세 나라하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김유신은 9월에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 · 김천존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타고 당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는 소정방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 있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귀실 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소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였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병과의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김진복(金眞服),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에게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치고 있던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등의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시켰으며,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 김삼광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김흠순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천황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선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1]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일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줬다.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대해 자문을 맡았다.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통치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김원술이 살아오자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각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병졸들을 9월에 돌려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은 표문과 많은 물품을 당에 바쳤다.
수명이 다함을 예견하다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 시경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지켜주던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김유신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835년에,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타고다니던 말목을 자르다.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
가치관 같은 것을 보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죄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일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신라 당대부터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알려진 문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
문무왕과 그 신료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문무왕은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일을 들며,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으니, 공의 일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며 김유신의 공적을 추켜세우면서 관직과 은상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구근(仇近) 열기와 함께 김유신의 명으로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으로 김유신의 추천을 받아 사찬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파진찬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원정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구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곤장을 치자, 구근은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께서는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으시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셨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억울해했고, 원정은 이 말에 평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라 여름이었는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군사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진천에서 태어나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출생의 전설
김유신장군이 국선(國仙)이 되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모의하던 중에 백석이란 낭도로부터 적국을 염탐하고 오자는 제의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중, 고개 위에서 우연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목적을 듣고 여자들은 잠시 백석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유신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들은 신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유신에게 백석은 적국의 사람으로 유신을 꾀어 적지로 데려가려 한다며 경고한 뒤 사라졌다. 골화관에 이르러 유신은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백석을 잡아 문초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석의 말은 이러했다.
백석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영양왕때 고구려에서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는 괴변이 생기자 고구려의 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노한 왕비는 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보아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추남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숫자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대답했다. 결국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고구려왕은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김서현의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고구려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유신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한 뒤 자신을 구해준 세 신들에게 제사지내어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화 세 지역의 신으로,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시조묘나 종묘 다음으로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서 우대하였다.
김유신의 검(사인검/四寅劍)
김유신의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서라벌 중악(中嶽)에서 선인을 만나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고, 기도 수행하다 별의 정기가 서린 보검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17세의 김유신이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머문지 나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귀한 집의 자제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김유신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 김유신은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던 난승은 김유신이 여러 번 간청하자 그제야 신비한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김유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난승과 김유신은 작별하였다. 그가 2리쯤 갔을 때 유신이 쫓아가 바라보니, 난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는 오색의 찬란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건복 29년(612년) 김유신은 다시 한 번 보검을 가지고 혼자서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중악에서 했던 것처럼 향을 피우며 하늘을 향해 보검에 빛을 드리우고 신령을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이후 김유신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표면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현지의 전승은 그것이 유신이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강릉에서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김유신의 검이 명주(溟州) 남쪽의 선지사라는 절에서 90일 만에 주조되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 김유신의 검은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 검을 가지고 김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죽은 뒤 명주 대관령의 산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인근의 여러 산과 계곡, 동굴 등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곳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 인터넷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