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고려국 개국) 상편
고려국 (고려국 개국) 상편
고려국 고려개국 상편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천수(天授) 2년(단기 3252, 919)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했다.
26년(단기 3276, 943)에 태왕께서 훈요(訓要)를 지으셨는데, 대략 이러하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법을 따랐다.
그러나 방위가 다르고 풍토가 달라 사람 성품이 제각기 다르니 진실로 반드시 동화되어서는 안 되리라.”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태봉국(泰封國)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인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고안승(高安勝)의 먼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강(剛)이 술가(術家)의 말을 듣고 (궁예의)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하여 궁씨(弓氏)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 모잠(牟岑) 대형(大兄, 벼슬 이름)이 유민을 모아 안승을 후고구려 왕으로 받들고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 왕이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전북 익산)에 살게 하였다가 후에 고쳐서 보덕왕이라 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자 보덕왕을 불러들여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뻘인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남아 반란을 꾀하고 왕이라 일컫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웅거하여 다시 모반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을 당했다.
그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궁예의 출생과 양길과의 만남
대진국 (14세) 명종 경황제 천복 9년(단기 3211, 878) 5월 5일에 궁예가 외가에서 출생했다.
이때 지붕 위에 흰 빛이 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쳐 있었다. 신라 일관(日官)이 이것을 바라보고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이 꺼려서 사람을 그 집에 보내 아기를 죽이려 하였다. 그 어미가 진귀한 보물을 주며, 아기를 안고 도망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후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을 길렀다. 궁예 나이 10여 세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장성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대로 거리낌없이 행동하였고, 계율에 구애받지 않았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궁예가 바리때를 들고 재(齋)를 드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상아 점대를 바리때 속에 떨어뜨렸다. 살펴보니 왕(王)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앞서 고안승 때부터 임금을 모시는 일에 공로가 있었으나, 신라는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땅과 백성을 모두 빼앗았다. 다만 왕의 누이동생으로 아내를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 유민이 이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원망이 쌓여 앙심을 품고 여러 차례 변을 일으켰으나 패하였다.
궁예는 국가가 쇠약하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기회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종(祖宗)(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여러 대의 원한을 씻고자 죽주(竹州)의 도적 기훤(箕萱)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나 기훤은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예로써 대우해주지 않았다.
궁예는 속이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申姮) 등과 몰래 결탁하여 친구로 삼아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고 일을 맡겼다. 군사 100기를 나누어 주고 동쪽 지방의 주와 군을 치게 하니 모든 고을이 항복하였다.
궁예는 또 아슬나(阿瑟邪 지금의 강릉)를 공격하였다.
무리가 600명에 이르자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군사와 고락을 함께하고 주는 일과 빼앗는 일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경외하였다.
왕륭의 귀순과 이훤의 후백제 건국
천복 27년(단기 3229, 896)에 태수 왕릉(王陵)이 궁예에게 송악군을 바치고 귀순하여 이렇게 설득하였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 땅에서 왕 노릇을 하고자 하시면, 먼저 송악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저의 장자 건(建)을 그곳의 주인으로 삼으소서.”
궁예가 이 말을 좇았다. 이때 이훤(李萱)이 무진주(武珍州 전라도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여 밝혔다.
“내가 삼국이 시작한 근원을 살펴보니 마한(중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신라)가 뒤에 일어나자 변한(가락)이 뒤따라 일어났다.
백제가 나라를 열어 6백 년을 전해오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의자왕의 분을 풀어 드리겠노라.”
드디어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궁예 또한 이듬해(단기 3234, 901)에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말했다.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는데 이것은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해 그 원수를 갚으리라.”
이에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일찍이 남으로 순행하여 흥주사(興州寺)에 이르러 신라 전왕(前王)의 화상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내리쳤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 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책(金幘)을 썼다.
또 스스로 경문 20권을 지어 때로 정좌하여 강설하기도 하였다.
이에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 라고 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추로 때려 죽였다.
왕건의 즉위와 궁예의 최후
천수 원년(戊寅, 단기 3251, 918) 여름 6월에 왕건이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날이 밝을 무렵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공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 라고 외치게 하였다.
이때 달려와 따르는 자가 무리를 이루었다. 궁문에 이르니 먼저 와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드디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이때 태봉 왕 궁예가 변란 소식을 듣고 미복으로 갈아입고 궁문을 빠져 나가 도망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斧壤, 지금의 강원도 평강) 백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서희 장군과 소손녕의 담판
거란의 성종이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보내어(성종 12, 단기 3326, 993) 봉산(蓬山)을 함락시키고 우리 선봉을 물리쳤다.
성종(成宗) 문의(文懿)대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할 때, 어떤 사람은 항복하자 하고 어떤 사람은 땅을 떼어 주자고 하였다. 중군(中軍) 서희(徐熙)가 홀로 아뢰었다.
“지금 적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급히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을 떼어 넘겨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이옵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어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 옵니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 진영에 들어가 상견의 예를 물었다.
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희가 “양국의 대신으로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라고 하니, 손녕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 소유이다. 너희가 이를 침식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도 바다 건너 송(宋)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전쟁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희가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 땅이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東京, 요령성 요양시)도 모두 우리 땅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감히 수빙(修聘)하지 않겠는가?”
말과 얼굴빛이 강개하므로 손녕이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병력을 거두기로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하였다.
윤관의 여진 정벌
도원수(都元帥) 윤관(尹瓘)이 여진을 쳐서 무찌르고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彦頤)를 임금에게 보내어 표(表)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그런데 평장사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 임의(任懿)와 추밀원사 이위(李瑋) 등이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윤관, 오연총(吳延寵), 임언(林彦) 등은 망령되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金緣), 이재(李載) 등도 역시 계속 탄핵하였다.
“임금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기르고자 함인데, 지금 성을 다투며 싸워 사람을 죽였으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함만 못하옵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입니다.”
임금이 물었다. “무엇 때문인가?”
김연이 아뢰었다.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을 때, 거란에 고하는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 우리의 옛 땅이다.
그 거주민 또한 우리 백성인데, 근래에 도적들이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다시 수복해서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문의 내용이 이러하나 궁한리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니 거란은 우리 주장을 망언이라 책망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만약 동쪽으로 여진을 방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을 방비한다면, 신은 9성이 우리 삼한(三韓)에 복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
간의대부 김인존(金仁存)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16세 예종)께서 유시(諭示)하셨다.
“두 원수가 여진을 친 것은 선제(先帝, 15세 숙종)의 유지를 받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행한 것이니라. 몸소 적의 칼끝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에 깊이 들어가서 베고 포로로 잡은 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천 리 땅을 개척하고 9주(州)에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 하리로다.
그러나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그 변덕이 심하다.
그 남은 무리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추장이 항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해 오니, 신하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고, 짐 또한 차마 하지 못하겠다.
유사(有司)가 법을 따져서 자못 탄핵하는 말이 많으므로 급히 그들의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까지 이를 허물로 삼지 아니할 것이다. 맹명시(孟明視)가 다시 황하를 건너 공을 세운 것과 같이 하기를 바라노라.”
예종 문효(文孝)대왕 4년(단기 3442, 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褭弗),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歸附)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鳥雅束)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이르러 궁한촌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國朝, 고려)에서는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호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을 청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재추(宰樞) 어사대 판사(御史臺 判事)와 중서문하성 성재(省宰), 지제고(知製誥), 시신(侍臣), 도병마판관과 문무 3품 이상을 소집하여 다시 9성을 돌려주는 것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옛 사서에는, “두 장군이 선춘령에 비를 세우고 이곳이 고려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에서 700리 밖, 송화강 근처 땅에 있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북방영토
광주목(廣州牧)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自解表)을 올려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군(中軍, 김부식)이 아뢴 바를 보면,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지어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하였다’ 하고, ‘임자(단기 3465, 1132)년에 임금께서 서경으로 순행하셨을 때 아국이 독자적으로 건원칭제(建元稱帝)하기를 청하였다’ 하며, 또 ‘국학생을 넌지시 꾀어 앞의 일(건원칭제)을 상주하게 하였는데, 대개 그 의도는 대국인 금나라를 격노시켜 일을 일으키고 틈을 타서 자의로 (반대자들을) 제거한 후 외인과 붕당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글을 두세 번 거듭하여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신이 건원칭제를 청한 것은 임금을 받드는 충정에 근본을 둔 것이옵니다.
본조(고려)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고, 옛 기록을 상고해 보면 신라와 발해가 비록 연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일찍이 이를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는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지금의 성세(聖世)에 이것이 도리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문제를 의논한 바 있으니, 죄라면 이것이 죄일 것입니다.
사당(死黨)을 지었다거나 대금(大金)을 격노시키려 했다는 말은 비록 엄청나나 본말(本末)이 서로 맞지 않사옵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아 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 그 붕당이라 지목한 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어떤 인물이옵니까?
무리가 만약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우더라도 곧 패하여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하겠습니까?
임금님의 명철하심을 믿고 거듭 생각하건대 신은 지극히 나약한 자질로써 서경정벌의 전역(戰役, 서경전역 西京戰役)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사옵니다.
이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니, 이제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족히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금사(金史)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 대정(大定) 15년(단기 3508, 1175) 9월에, 고려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서언(徐彦)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땅을 가지고 내부(內附)하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종 11년(단기 3449, 1116) 3월 을미 초하루에, 임금께서 요나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 두 성(城)이 여진에게 공격 당해 성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邵億)을 시켜 쌀 1천 석을 보내셨다. 그러나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살갈(撒喝)이 요나라의 내원·포주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자, 그곳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韓噭如)를 보내어 야율녕을 불러 효유하게 하셨는데, 야율녕이 임금의 전지(傳旨)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교여가 급히 보고하자 임금께서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箚子)를 갖추어 보내려 하셨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임금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그만두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포주는 본래 우리 옛 땅인즉 돌려주기를 원하노라”라고 청하셨다. 금나라 임금이 아국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직접 빼앗으라”라고 하였다.
이존비의 역사의식과 낭가의 자주독립 정신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단기 3566, 1233~단기 3620, 1287)는 고려 경효왕(景孝王)(25세 충렬왕) 때 사람이다.
일찍이 서연(書筵)에서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환단(桓檀)·조선·북부여·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自主)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사대(事大)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있어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옵니까?
또한 왜와 더불어 원한을 쌓고 있으니 만약 원나라 왕실에 변고가 생긴다면 장차 무엇을 믿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라 칭하는 일을 이 시대에 꺼리고 기피하여 갑자기 회복하기는 진실로 곤란하나 자강(自强)의 계책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상주한 것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들은 자마다 옳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뒤에 왜(倭)에 대비하는 다섯 가지 계책(五事)을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 백성을 병사로 만들 일, 둘째, 병.농(兵農) 일치의 제도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킬 일, 셋째, 군량을 저장하고 전함을 만들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고 육조(陸操)도 겸하여 익힐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알아 두고 인화(人和)를 확보할 일이라 하였다.
일찍이 회당상인(晦堂上人)에게 준 시 한 수가 전하니 이러하다.
사물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나서 쓰임이 있나니
누가 쓴 오얏나무에 열매가 많다고 싫어하리오.
맏자식은 오랜 동안 조정에서 천자 모시고
둘째는 새로이 절간에 출가하였네.
임금께 충성함은 신하의 직분이지만
애착 끊고 세간을 벗어남 또한 어떠하리.
노옹은 오히려 체념하고 웃을 수 있으니
내 영혼은 꿈속에서 하늘 끝에 올라 아득히 헤매이네.
임금(충렬왕)께서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계실 때, 연녀(蓮女)에게 매혹되셨다.
이별할 때 연녀가 손수 연꽃 한 송이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만약 이 꽃이 시든 것을 보시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할 것이옵니다.”
며칠 뒤에 꽃을 보니 초췌해지고 있었다.
임금은 연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셨다.
존비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청하여 연녀를 찾아갔다. 연녀가 울며 시를 바치니 이러하였다.
연꽃 향기를 서로 주고 받으니, 처음에는 붉은 빛 아리따웠네.
꽃을 드린 지 며칠 지나니, 시든 모습 님과 같사옵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시면 연녀를 더욱 그리워할 것을 우려하여 연녀 대신 시를 지어 올렸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추지 마오. 수레를 멈추지 마오.
이 몸은 연잎에 맺힌 이슬 같나니 저쪽 이쪽 둥글게 굴러다닌다오.
임금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환국하셨다.
뒤에 임금이 연녀에 대한 원망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존비가 아뢰었다.
“신이 그때 모시고 돌아오기를 급히 서두르려고 부득이 거짓으로 시를 지어 올렸으니 바라옵건대 임금을 속인 죄에 벌을 내려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임금이 노하여 관직을 빼앗고 문의(文義)에 귀양을 보내셨다.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이 풀어주시기를 반복해서 주청하였다. 임금 역시 후회하여 다시 복직시켜 소환하셨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존비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 임금은 부음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셨다.
태자가 장례에 임하여 말하였다.
“이존비는 정직한 나라의 직신(直臣)인데 어찌 이같이 요절한단 말인가?”
이에 임금께서 왕례(王禮)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셨다.
마침내 형강(荊江, 현 금강) 가에 있는 산 4리를 둘러서 봉하니, 지금까지 동(洞)을 왕묘동(王墓洞)이라 부르고, 마을(里)을 산사리(山四里,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라 부른다.
< 고려 하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