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구려 개국) 하편
고구려 (고구려 개국) 하편
고조선 땅 회복을 위한 외교 정책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上佐平)과 함께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仁義)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렇게 두 번, 세 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대침략
개화(開化) 4년(28세 보장제, 단기 2978,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振) 등 수십만을 거느리고 요택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張君叉)가 대패하니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작은 성)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盧) 고정의(高政義)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대답하였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鋒)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몰래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貴國)의 힘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들어와 전쟁을 하는데 말 먹일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이에 연수가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리를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보장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柱石)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류공권(柳公權)의 소설에, “당나라의 6군(六軍)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英公)(이적)의 군기가 흑기에 포위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라고 쓰여 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新舊唐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通鑑)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서 수치스런 일을 숨기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군의 군량은 이미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는다면 대세가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두드리며 여유있게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될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에 올라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이 노기가 극도에 달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녀 모두 생매장시킬 것이라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건히 지키므로 공격을 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에 수군 제독 장량(張亮)의 군사는 사비성(沙卑城)에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烏骨城)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관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섬은 장수들과는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지금 건안(建安)·신성(新城)에 있는 적군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거느린 말갈 군사 또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서 낙랑의 모든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적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져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먼저 안시를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이 문제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밤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공격하였다. 적진에서는 서로 짓밟혀 죽고 상처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드디어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군세를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 모든 진영은 싸울 생각을 거의 잃어버렸다. 부복애(傅伏愛)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당하고, 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灤河)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懸)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新城)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桶道城)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이고,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江左)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 본토까지 뻗었던 백제, 신라의 영토
이에 앞서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遼西) 진평(晋平)이고,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회계(會稽)·오성(吳城)·좌월·산월.천주(泉州)라 하였다.
명치 12년(단기 2835, 502)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百濟郡)이 없어지고 말았다.
왕개보(王介甫)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男生), 남건(男建)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한 데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꺾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때는 개화 16년(28세 보장제, 단기 2990, 657) 10월 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요동과 요서의 고구려 영토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開平府)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湯泡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6세, 단기 2386, 53~단기 2479, 146)께서 쌓으신 것이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고려성 회고시」 한 수를 지어 세상에 전하니 이러하다.
외진 땅의 성 문은 열리고 구름 숲 속 성 위에 담장은 길게 이어졌네.
물은 맑아 저녁 노을 반짝이고 어둠 깃든 모래 땅엔 별빛이 비치네.
북소리 둥둥 울리니 구름도 따라 일고 새로 핀 고운 꽃은 흙을 털고 단장했네.
슬그머니 하루아침에 저자거리로 바뀌어 피리·나팔 소리 다시 들을 길 없어라.
누런 흙먼지 속 무성한 가시나무, 옛 길 가에는 쑥대만 우거져 있네.
무상한 세월의 티끌 아름답던 비취 묻어 버렸고
거친 언덕엔 소와 양이 오르는구나.
화려하던 옛 시절 이미 사라졌는데
깊어 가는 가을 소리에 기러기만 날아가누나
내가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그 운(韻)을 따라 한 수 읊는다.
요서(遼西)에 옛 성터 아직 남아 있으니
생각컨대 명성 높은 나라의 운수 틀림없이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에 전쟁도 많았지만 요하의 도도한 물결은 하늘빛 같네.
바람 불어 나무는 빈 골짜기에서 춤추고
학은 자태를 꾸미며 높은 나무에서 우는구나.
변방 지키던 방패와 깃발 하루저녁에 바뀌어
값을 외치는 장사꾼 방울소리 처량하게 들리네.
연(燕)(하북·산서)과 양(凉)(감숙)은 본래 우리 땅이니
관병이 오래도록 지키며 말 먹이던 곳이라.
영웅은 다시 오지 않고 지난 일은 아득하니
양떼 내몰 듯 도둑떼 몰아낼 날 다시 없을런가.
이제와 옛일 한없이 슬퍼하는 이 내 마음
만리 길 떠나는 핵랑(核郞)의 노자(路資)로나 쓰시게.
요서 지방에 10성을 쌓음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니,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遼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豊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遼澤城)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단기 2390, 57) 봄 정월에, 또 백암성(白岩城)과 용도성(桶道城)을 쌓으셨다.
삼한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舊志)에 말하기를, 요서에 창료현(昌遼縣)이 있는데, 당나라 때 요주(遼州)로 고쳤다. 그곳 남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에 암주(岩州)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唐山)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開平)인데 일명 개평(蓋平)이라 하였으니, 당나라 때 개주(蓋州)는 이곳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柳城)과 노룡(盧龍)사이에 있다. 한서(漢書)에 마수산(馬首山)이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나라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개국 공신 연타발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葛思)를 오가면서 이재(理財)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訥見)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坐原)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살에 세상을 떠나니, 때는 평락(平樂) 13년(단기 2309, BCE 25) 병신년 봄 3월이었다.
백제의 시조와 건국 과정
고주몽 성제가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단기 2292, BCE 42)년 3월에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辰) 번(番)(옛 진한과 번한)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 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朱蒙帝)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단기 2315, BCE 19)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마려(馬黎) 등이 온조(溫祚)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 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백 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신라의 기원과 박혁거세의 혈통
사로(斯盧)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居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왜와 고구려의 관계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仇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首邑)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鷄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永樂)(광개토열제) 10년(단기 2733, 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聯政)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에서 서역(인도)이라 하였으나, 이제 모든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태국)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유타인이 혹시 대식국(大寔國)의 침입을 받고 쫓겨나서 이곳(태국)에 이르러 살게 되었던 것일까?
이명(李茗)의 『진역유기(震域留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싣고 돌아올 때,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 왕래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이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신교와 유불선의 정수 집대성 : 다물흥방가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安臧帝)(519~531) 때 조의선인으로 뽑혀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본래 을소(乙素)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받아들여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이름난 조의(皂衣)가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3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함께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먼저 가신 선령님은 우리 삶의 법이시고
뒤에 오는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 받드네
선령님을 본받음은 그 정신이 불생불멸
후손들 선령 위함 귀천이 어디 있나
사람은 천지 중심 대천지와 하나이니
마음은 몸과 함께 온 우주의 근본일세
사람이 태일 됨에 차고 비나 같은 경계
우주의 근본이라 신과 만물 둘 아니네
참될 진은 온갖 선의 극치에 이름일세
삼신님은 일심중도 만사만물 주장하네
참과 선의 극치에서 세 가지 참 귀일하고
삼신님이 일심에서 삼신일체 창조할새
하늘 아래 온 땅에서 오직 내가 있음이여
옛 땅 옛 혼 다물하니 나라를 부흥하네
스스로 생존함에 함이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부흥함에 말이 없이 가르치네
참 목숨이 크게 생함 성통광명 이유라네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라
광명하여 모든 선을 다 받들어 행하옵고
효도 충성 다함으로 일체 악행 짓지 말라
만백성의 정의로움 나라 위한 중한 마음
나라가 없다면 내가 어찌 살아가리
백성에게 만물 있어 우리나라 복이 되고
이 나라에 혼이 있어 우리 백성 덕이 되네
우리 혼은 삼혼이니 생함과 깨달음과
신령함이 예 있구나 삶과 지혜 닦아 보세
조화신이 머무르는 천궁이여 이내 몸이여
몸과 영혼 함께 닦아 영원불멸 얻으리라
우리들 자자손손 나라 잘 다스리고
대광명의 신교 배움 영원한 스승일세
우리 자손 통일되면 모두 잘 살리니
우리 스승 가르침은 새롭고도 새로워라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거주하며 오직 하늘에 천제 올리고 수련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대개 신선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율을 삼고 그 이름을 더욱 굳세게 지켜 서로 영광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만물을 살리고 몸을 던져 정의로움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었으니, 천추만세에 추앙을 받아 능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인존(人尊)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대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한 명승이다.
<환단고기 역사책 원문 옮김> <끝>